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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행기

베스트 터키여행>강추!> 동서 융합문화의 보고(寶庫), 터키(돌궐)에 매료
강*식 님 2018.07.03 조회 2704

아래 내용은 고객님께서 직접 다녀오신 여행 상품에 대해 작성하신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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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융합문화의 보고(寶庫), 터키(돌궐)에 매료되다

고대 유적지와 신비의 자연을 만끽하는 다시가고 싶은 멋진여행^^*

 

 

이 글은 원고지 100매 분량이다. 터키 여행자에게 터키를 좀 더 다양하게 알게 하는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분량이 많아서 1(1-2일차), 2(3-5일차), 3편(6-9일차)으로 나누어 블로그에 올립니다. 사진 게재에 시간이 소요되어 블로그 주소를 달았습니다.

 

 

 

◎제1편: 돌마바흐체 궁전, 샤프란볼루
goo.gl/mT67xi

 

◎제2편: 카파도키아, 파묵칼레, 안탈리아
goo.gl/c1Uoeu

 

◎제3편: 에페소, 트로이, 성소피아 성당
goo.gl/U2QyKc

 

 

 

형제의 나라, 이스탄불, 성소피아가 먼저 떠오르는 먼 나라가 바로 터키다. 필자에게 필연적으로 다가온 터키, 일주일 넘게 호기심으로 학생 때 배운 세계사를 다시 보는 듯 했다. 왜 그럴까. 세계 유일의 아시아와 유럽의 융합, 기독교와 이슬람의 융합의 보고(寶庫)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정학적 위치 자체가 터키는 세계의 중심이다.

 

여행자에게 터키는 가고 싶은 나라 중에 포함이 된다.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가는 대로, 생각한 대로 알면 알수록 터키의 진가를 알 수 있다. 일주일 동안 버스로 이스탄불을 출발해서 터키 서부를 시계방향으로 약 4,000km를 달렸다. 장거리 이지만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함께 달리는 광활한 대지와 지평선이 내 시선을 훔쳐갔기 때문이다.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 위를 달리는 차에서 로마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흥망성쇠를 상상해본다. 밀, 목화, 해바라기, 무화과, 오렌지, 올리브 등 풍부한 곡식, 채소와 과실들이 천지에 널렸다. 동네마다 곳곳에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이슬람 첨탑이 터키 세상을 깨끗하게 정화하고 있다. 알라신의 영광을 받으려는 무슬림의 선한 마음이 창가를 청결하게 하고 있다.

 

▶ 무수타파 케말 아타투르크 (터키의 국부, 개혁가, 건설자)

 

 

터키의 시가지의 중심지나 상점 등 곳곳에 있는 동상과 사진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터키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 튀르크(1881-1938)이다. ‘아타 튀르크’는 1934년 터키 국회에서 ‘터키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증정한 것이다. 케말은 터키인에게 신처럼 추앙을 받고 있다. 국민과 결혼했다는 그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오늘날의 터키를 만든 국부로서의 신뢰와 믿음이 크다.

 

무스타파 케말은 1차 세계대전시 지휘관으로 탁월한 군인이었고, 겔리볼루 전투에서 영국의 윈스턴 처칠 군대를 물리쳤다.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은 세브르 조약에 의해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분할 점령했다. 케말은 슐탄 권력을 무너뜨리고, 1921년 앙카라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연합국을 격퇴하여 1923년 로잔조약에 의해 아나톨리아 반도의 영토를 확정했다.

 

무스타파 케말은 술탄을 폐지하고, 외세를 물리 친 영웅이고, 일찍이 남녀평등을 헌법에 명시하고, 문자개혁을 단행하고, 세속주의 원칙(종교를 관습과 가치관에서 분리), 성(姓)을 최초로 사용하게 하는 등의 케말리즘 개혁으로 터키인으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다.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을 빼고 현대사에서 과연 우리는 누구를 추앙하고 있는가? 이승만, 박정희를 잃은 우리에게 케말파샤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매년 10월 29일 오전 9시 5분에 싸이렌이 울리고, 터키인들은 국부에 대한 존경심을 표한다고 한다.

 

 

▶ 터키 개황

 

 

터키의 인구는 8천 5백만명, 면적은 한반도의 3.5배 (남한의 8배),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로 터키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 지중해, 흑해를 내해로 삼고 아시아와 유럽의 중원을 지배했던 오스만 제국의 자존심이 살아있다. 지하자원이 풍부(석유 매장)하고, 고대국가 유적지의 역사 숨쉬고, 신비로운 자연이 널려있는 터키는 여행자에게 도전의 대상이다.

 

터키는 그리스, 불가리아, 시리아, 이란, 이라크, 아르메니아, 조지아(그루지아) 등 7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그리스와는 키프로스 문제, 시리아는 난민문제, 이라크와는 쿠르드족 문제 등으로 국제적 분쟁이 있다. 터키의 국토는 장구 모양이며 우리나라의 경주와 신의주와 사이의 위도에 위치하고 있어 우리나라와 기후가 비슷하다. 터키는 현재 유럽연합의 준회원국이다. 독일 다음으로 큰 나라이다. 터키는 이슬람이 국교는 아니지만 무슬림이 99%이다. 과거 오스만 제국에 대해 역사적으로 유럽인들이 터키를 꺼리는 경우도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키프로스 문제 등으로 아직은 유럽연합에 가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준회원국으로 곡식, 채소 드으로 유럽을 먹여 살리고 있다.

 

 

터키는 1950년대에 영농 기계화를 했다. 광활한 평야를 기계화를 하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없다. 워낙 넓기 때문이다. 밭농사, 목화 재배와 가죽산업 등 1차 산업이 15%를 차지하고 있고, 자급자족을 하는 나라이다. 축구 구단은 200개나 된다. 지난 2002년 월드컵 4강전에서 운명적으로 두 나라가 만났는데 형제지국답게 찾아온 터키에게 3:2로 우리가 졌다.세계 3대 요리 국가로 불리는 터키의 음식은 불에 구은 음식이란 뜻의 케밥이 유명하다. 아무리 유명하다 해도 동양인에게 입에 맞을 리가 없다. 대부분 짜고, 향이 독하여 거부감이 있다. 터키는 밀 농사가 잘 된다. 따라서 빵값이 매우 싸고, 에크백, 피데, 시미트 등으로 불리워 지는 빵은 방부제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식후에도 더부룩하지 않다. 특히 화덕에서 구워낸 빵은 일품이다. 또 남은 빵은 집, 상점 앞에 내놓고 누구든지 무료로 먹을 수 있게 한다.최근 대선에서 1차 투표로 승리한 에르도한 현 대통령은 “나라가 이겼다. 터키가 이겼다, 감사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최근 쿠데타를 진압하고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의 발판을 만든 에르도안의 비전이 얼마나 실현될지 궁금하다. 장기집권이 곧 독재가 되질 않길 바랄 뿐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보듯 우려되는 점이 있다. ‘21세기 술탄’으로 불리는 에르도안은 이슬람주의자로 최근 쿠데타에 대한 미국이 반응을 보고 반미성향을 갖고 있다. 유럽과 러시아 그리고 미국 사이에서 터키 국익을 위한 어떤 정책을 펼칠지가 궁금하다. 7박 9일의 시간은 긴 시간이었지만 터키를 알기에는 아주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11시간을 날아 온 보람은 충분했다. 카파도키아의 기암절벽과 신비스런 바위상, 세상에서 처음 본 파묵칼레의 석회봉, 지중해를 품은 안탈리아, 고대국가의 영화를 재현하고 있는 에페소, 돌마바흐체 궁전/톱카프 궁전/성소피아 성당/블루모스크 등의 문화유산으로 들어가 보자. 메르하바!

 

 

 

◎ 1일차 (터키의 중심도시, 이스탄불 도착)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11시간 동안 달려온 곳은 터키 이스탄불 아타 투르크 공항이다. 바로 터키의 국부(무스타파 케말)의 이름을 명명한 곳이다. 이스탄불은 유럽의 끝자락 발칸반도와 아시아의 시작 아나톨리아 반도를 잇고 있다. 이스탄불 도시는 3%는 유럽이고, 97%가 아시아쪽으로 형성되었고, 인구는 1,700만명의 거대 도시로 7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졌다.

 

 

터키를 감싸고 있는 바다와 내해, 해협이 있다. 북부에는 흑해가 있는 서부쪽으로 에게해, 남부쪽으로 지중해가 있다. 내해로 마르마라해가 있고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두 개의 해협이 있다. 차나칼레에 있는 다르다넬스 해협은 다리가 없고, 이스탄불에 있는 보스포루스 해협에는 3개의 다리가 있다. 또 골든혼(황금 곶)이 있는데 주변의 야경은 세계3대 야경에 포함될 정도로 아름답다.이스탄불은 기원전 660년 그리스 시대에는 비잔티움(Byzantium),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으면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1453년 술탄 메흐멧 2세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오스만제국의 중심적인 도시가 되었다.

 

1923년까지 1,600년 동안 수도였던 이스탄불에는 그리스·로마시대부터 오스만 제국시대에 이르는 다수의 유적들이 분포해 있다.<터키 인사말 몇마디>안녕하세요 “메르하바”, 아침인사 “귀나이든”, 매우 감사합니다 “촉 싸올”, 예쁘다 “규젤”, 이름이 뭐예요 “아듬 네 ?”, 화장실이 어디죠 “투알렛 네레데”, 얼마예요? “네 카드르”. 터키의 언어는 있지만 문자는 없다. 아랍어를 쓰다가 무스타파 케말이 1923년 알파벳을 사용하여 현재의 모음 8자, 자음 21자로 문자개혁을 단행했다. 이를 통해 문맹을 줄이고 어려운 아랍어를 대신하여 현재의 쉬운 문자체계를 갖고 되었다.

 

 

 

◎ 2일차 (보스포루스 해협과 돌마바흐체 궁전을 보다)

 

▶ 돌마바흐체 궁전

마르마라해는 내해로 파도가 잔잔하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두고 서쪽의 유럽과 동쪽의 아시아가 한눈에 보인다. 유람선에 몸을 싣고 이스탄불의 멋진 풍경과 첫 인사를 나눈다. 멀리서 갈라타 타워, 돌마바흐체 궁전과 보스포루수 1대교가 보이고, 아시아쪽에 위스크다르가 보인다. 위스크다르는 크림전쟁시 나이팅게일이 병원업무를 보았던 곳이고,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터키참전병들이 고국을 그리며 ‘위스크다르’ 민요로 유명한 곳이다.돌마는 가득찬, 바흐체는 정원이란 뜻이다. 즉 정원으로 가득찬 궁전의 의미를 갖고 있다. 31대 압둘마지드 1세 술탄(1839-1861)이 1856년 대리석으로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해서 바다를 매립하여 만들었다. 6명의 술탄과 마지막 칼리프인 압뒬메지드가 살았고, 공화국 출범 후에는 터키의 국부 아타 투르크가 1927년-1938년 사이에 머물러던 곳이다.

 

 

돌마바흐체는 터키에서 가장 큰 궁전이다. 술탄이 국정을 보았던 접견실, 사생활 공간 하렘, 그리고 국가의식에 행해졌던 행사장 등 3개의 구역이 있다. 285개 방과 44개 거실, 68개 화장실, 6개 목욕탕으로 구성되었다. 현재에도 국가행사의 영빈관으로 사용되고 있다.현재의 돈으로 약 5 천억원이 소요되었고, 금 14톤, 은 40톤이 들어갔다고 한다. ‘황제의 방’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선사받은 750개의 전구(4.5톤)로 장식되었다. 또한 케말 아타 투르크가 1938년 서거할 때까지 사용했던 방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방의 시계는 그를 기리기 위하여 아직도 그가 사망한 시각인 9시 5분을 가리키고 있다.

 

 

▶ 샤프란볼루(Safranbolu)

 

 

터키의 관광객으로 독일, 러시아인이 순으로 많이 방문하는데 물가가가 저렴하기 때문에 여름철 장기휴가를 많이 온다고 한다. 최근 중국인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관광지에는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등이 병기된 곳이 많다. 돌마바흐체 궁전을 둘러보고 보스포루스 1대교를 지나 과거 실크로드의 대상(카라반)들이 경유했던 상업 중심지 샤프란볼루(Safranbolu)를 찾았다.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오스만 투르크 시데 목조 건축물 1천여 채가 잘 보전되었다.

 

 

□ 돌궐(투르크: 터키)과 고구려 인연

중국의 진시황이 흉노족의 침입을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다. 몽골고원에서 발원한 돌궐(투르크)족은 흉노족의 후예로 알려졌다. 돌궐은 당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동돌궐, 서돌궐로 나누어져 패망했고, 서돌궐이 지금의 터키가 된 것이다. 돌궐 당시에 중국의 수나라에 대비하여 고구려와 돌궐이 동맹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거침없는 동력을 가진 유목민의 웅비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이런 역사를 볼 때 터키(돌궐)와 우리는 각별한 관계에 있다. 얼굴은 완연히 다르지만 생각은 동양적이다. 당시의 훈족이라고 있었는데, 이들이 지금의 헝가리에 정착했다는 설이 있다. 터키 국민의 80%가 터키인(투르크족)이다. 하지만 아시아과 생김새가 다른 것은 수세기동안 유럽을 지배하면서 타민족과 결혼해 피가 섞인(혼혈) 탓이다. 인구의 17%가 쿠르드족이다.

 

◎ 3일차 (기암 괴석의 카파도키아 사파리 투어)

 

 

▶ 소금호수 (투즈 괼, Salt Lake)

 

 

터키 수도 앙카라에서 카파도키아로 넘어가는 사이에 세계에서 2번째로 큰 소금호수가 있다. 여름엔 물이 증발하여 흰 소금을 들어낸다. 염분이 33%나 된다고 한다. 황량한 벌판에 갑작스런 흰색의 소금호수라. 호수 주변은 하얀색으로 눈이 내린 것일까. 호숫가로 다가서 소금을 만져보았다. 신비스럽다. 천연 소금이 이렇게 사람의 노동없이 자연으로 생산될까. 굵직한 소금 덩이가 이채롭다. 이 곳도 우기에는 물로 가득찬다고 한다. 한참을 버스로 이동해도 소금호수는 함께 가고 있다. 그 만큼 광활하다.

 

▶ 으흘라라 계곡

 

 

으흘라라 계곡은 영화 스타워즈 촬영지로 유명한 곳이다. 멀쩡하게 보이는 들판인데 자세히 들여다 보니 장관이다. 약 20km에 달하는 웅장한 계곡 양옆으로 60여 개의 교회와 수도원이 있다고 한다. 비잔틴 시대에 은둔생활을 한 수도사들이 만든 것들이다. 지각변동으로 생긴 아찔 아찔한 장관은 장시간 이동하는 이방인에게 시원함을 제공하는 듯하다.

 

 

▶ 대린구유

 

 

지하도시. 말로만 듣던 곳을 직접 체험해보니 탄성이 절로 나온다. 사람이란 이런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구나. 또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어떤 고통과 시련을 참고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원 700년,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들어와 교육기관, 교회, 와인저장고를 만들었고, 최대 3만명까지 수용이 가능한 대규모 지하도시(지하 22층, 55개 통로, 개미집, 40여개 발견)였다. 인분을 말려서 연료로 사용하고, 오줌은 물로 사용했다고 한다.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움추려서 다녀야 한다. 지하도시를 체험하고 나오니 몸이 뻐근하다.

 

▶ 카파도키아(Cappadocia)

 

 

카파도키아는 4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건립된 기암으로 이루어진 마을들을 일컫는 지역명이다. 로마시대에 기독교 박해를 피하기 이해 그리스도 교인들이 이 곳에 몰려 살았다. 커다란 암석 바위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거주하며 신앙생활을 한 거주지다.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무려 365개나 된다고 한다. 천년이 지났는데도 그 당시의 벽화가 선명하기도 한다. 비둘기 피로 그림을 그렸다는 성화에서 고대 역사의 성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회백칠을 한다음 마르기전에 비둘기 피로 그림을 완성했는데 이것이 프레스코화이다.카파도키아의 기암절벽을 제대로 보기 위해 사파리 짚차에 탑승했다. 황량한 대지위에 사암이 풍화와 침식작용에 의해서 생겨난 형형의 기암들이 널려있다. 터키의 발랄한 전통음악을 들으며 벌판을 질주하는 것은 사파리의 묘미일까. 천년이 넘는 긴 세월이지만, 세월이 멈춰선 듯 이렇게 온전히 그 역사가 남아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중한 역사가 오래토록 잘 보전되길 바랄 뿐이다. 터키에는 워낙 많은 유적, 유물이 많다. 이스탄불의 데오도시우스 성곽위에 레스토랑도 있다. 갈라타 타워도 마찬가지다. 유적이 유적답게 보전되길 기대해본다.

 

 

▶ 파샤바 계곡

 

 

카파도키아 중부 내륙의 아나톨리아 고원에 위치한 광대한 기임괴석 지대이다. 약 300만년 전에 화산 폭발로 대규모 지진활동으로 잿빛 응회암이 뒤덮고 있다. 풍화작용으로 송이버섯 모양의 특이한 암석군이 형성되었다. 신의 손으로 마치 가공한 듯하다. 아무리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다고 해도 이렇게 예술적인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터키의 전설을 담고, 터키를 지키는 지신 같았다. 파사바 계곡은 벨기에 작가 페요가 이곳에서 ‘개구장이 스머프’의 영감을 얻었고, 스타워즈 영화의 배경이 되었다.

 

 

 

◎ 4일차 (카파도키아 – 지중해 안탈리아 장시간 이동)

 

 

▶ 카펫 제작 공장 방문

 

 

카파도키아에서 이른 새벽에 열기구를 탈 계획이었다. 새벽 5시에 호텔 앞에서 열기구 버스차량을 기다리고 있는데 기상 악화로 취소되었다. 열기구는 기상에 민감하고 자칫 안전사고가 우려되기 때문에 “인샬라”로 넘겨야 했다. 열기구를 타고 다시한번 카파도키아의 멋진 기암괴석을 볼려고 했는데 아쉽게 되었다. 이동중에 카펫 생산 공장을 들렀다. 누에고치에서 실크를 뽑아내는 장면이 기이했다. 카펫에 들어가는 실은 천연염색을 한다고 한다. 분홍색은 장미, 보라색은 가지, 노랑색은 치자 등으로 만든다. 카펫은 오래 될수록 값이 배가 된다. 카펫은 면, 양털보다 실크가 비싸고, 천연염색 색상과 디자인에 따라 값이 달라진다. 카펫은 완성할 때까지 한사람이 한다. 터키산 카펫은 이중 매듭을 하기 때문에 최소 100년은 간다고 한다.

 

▶ 오브룩 한 (Obruk Han) 호수

 

 

오브룩 한은 실크로드 시대의 대상(카라반)의 숙소였으며, 여행정보와 물건 매매, 숙박과 식사를 제공하는 곳이었다. 바로 오브룩 한의 뒤쪽에 큰 호수가 있다. 지진에 의해 꺼진 땅 속으로 지하수가 채워지면서 생겨난 호수이다. 깊이가 200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허허벌판에 생뚱맞게 만들어진 호수가 기이하다. 버스가 도착하자 시리아의 어린이 난민들이 몰려들었다. 현재 시리아 난민 200여 만명이 터키에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제주도에 예멘에서 온 난민들로 인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 유목생활과 농경생활

유목생활과 농경생활은 완연히 다르다. 유목민들은 계속 이동하기 때문에 음식에서도 건제, 염제, 훈제로 한다. 요구르트, 치즈, 육포 등도 유목민에서 유래된 것이다. 농경생활은 곡식을 생산하기 때문에 정착를 해야하고, 이를 위해서 계급사회가 이루어졌다. 터키의 선조는 유목민이었다. 유목민은 철저한 공동생활이었다. 유목민은 강해야 살아 남았다. 터키인은 열정적이고 강한 편이다. 자존심이 강하며, 모욕적인 행위가 발생하면 죽음을 불사한다고 한다.

 

 

□ 터키의 이슬람 문화

 

터키인의 99%는 무슬림이지만 국교가 이슬람은 아니다. 그래서 세속주의적이고 수니파에 속한다. 140여 개의 이슬람 종파가 있다고 한다. 시아파는 정통 이슬람주의라면 수니파는 약 90%의 무슬림이 믿는 종파로 현실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은 전파 속도가 빠르다. 입교 절차가 “알라는 유일신이다”라고 세 번 크게 외치는 절차를 걸치고, 1/10(십일조)가 아니라 1/40 즉 2.5%를 헌금한다고 한다. 종교 지도자(이맘:imam)는 국가에서 급여를 준다고 한다. 동네마다 사원(자미)이 있고, 첨탑도 1개, 2개, 4개, 6개가 있는 곳이 있다. 주로 돈이 많은 무슬림이 기증하여 사원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 5일차 (지중해 안탈리아 항구와 파묵칼레를 보다)

 

▶ 안탈리아 항구, 지중해 유람선

 

 

안탈리아는 지중해의 가장 대중적인 관문, 휴양도시로 2016년 박람회가 열린 곳이며, 이곳에는 약 450만명을 수용하는 호텔이 있다고 한다. 터키 연예인이 6개월 동안 이곳에 공연을 할 정도라고 한다. 유람선을 타고 지중해 안탈리아 항구 주변을 돌았다. 스페인-포루투칼-모로코를 다녀오면서 지중해를 보았는데, 두 번째 보는 지중해라서 나름 새로웠다. 멀리서 토로스 산맥이 보이고, 잔잔한 파도에 둥실거리는 범선과 하나된 듯했다. 넘실대는 파도는 발자국, 손자욱을 그려대듯 문양을 만든다. 이 문양은 마치 카펫의 꽃 모양과 같다.

 

▶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문

 

 

지중해 유람선을 하선하여 절벽 위에 있는 구시가지를 둘러보았다. 주로 카페와 상점들이 있고, 해안을 끼고 있는 그 광경이 매우 아름답다. 이어서 130년 로마제국 5현제의 한 명인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안탈리아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3중 문으로 과거 성벽의 출입구의 역할을 했다. 터키에서 가장 잘 보존된 아치중의 하나라고 한다. 1,800년이 지났지만 그 위엄과 뛰어난 조각은 훌륭하다. 하드리아누스 아치 밑에 고대에 만들어진 길이 있다.

 

 

▶ 올림포스 산

 

 

터키 국립공원인 타흐탈리 산은 제우스 신의 땅, 올림포스 산이라고 불린다. 높이가 2,365미터로 정상에 올라서면 아찔하다. 세계에서 두 번째, 유럽에서 가징 긴 케이블카를 타고 구름속을 뚫고 갈 때는 장관이다. 신들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을 보는 것이다. 이 공원에는 이 지역에서만 자라는 삼나무 및 험준한 바위 및 계곡이 펼쳐진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패러글라이딩 시설도 있다. 사람도 새처럼 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 파묵칼레 (Pamukkale)

 

 

파묵은 목화이고, 칼레는 성채라는 의미다. 이 곳은 온천마을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파묵칼레 온천수는 섭씨 35도로 류머티즘, 피부병, 심장병 등에 효과가 있다고 전해지며, 그리스, 로마, 메소포타미아 등에서 몰려들었다고 한다. 파묵칼레는 터키 관광 명소 중의 하나이고, 사진으로 많이 소개된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온천수가 거의 없고, 색상도 파랑색이 없어서 다소 실망은 했다. 하지만 그 넓은 지역이 마치 새하얀 눈이 온 것처럼 하얀색 석회봉으로 덮여있는 것이 신기했다. 일부 온천수가 흐르고 있고, 신발을 벗고 족욕을 즐겼다. 족욕후에 피로감이 풀린 것을 실감했다. 클레오 파트라가 이곳에 와서 휴양을 즐겼다고 하는데, 직접 목욕을 했다는 수영장이 있다. 이 수영장 바닥에는 당시 유적 유물이 그대로 놓여있다.

 

▶ 히에라 폴리스 고대도시

 

 

기원전 2세기 경, 페르가몬의 왕 에우메네스 2세가 건설한 도시이다. 이 도시는 파묵칼레 온천수가 있는 곳으로 질병의 치료와 휴양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내륙에 건설한 것이다. 파묵칼레와 바로 인접해 있고, 1만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대극장이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대극장의 수용인원의 10배가 도시인구로 환산하는데 이곳에는 15만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원형대극장 뿐만 아니라 주변 일대의 광활한 지역에 셀 수 없는 수 많은 유적들이 산적해 있다. 터키에서는 언제나 이 도시를 복원할까. 그 날을 기다려 본다.

 

◎ 6일차 (난생처음 열기구도 타고, 고대국가 에페소를 가다)

 

▶ 파묵칼레(열기구)

 

 

이 날 기상이 좋아서 계획된 열기구를 탔다. 난생처음 타 보는 열기구이다. 바구니에 약 20여 명이 탑승하고, 그간에 큰 풍선같은 열기구에 뜨거운 공기를 주입하는라 소리가 요란하다. 또 그 열이 바로 머리 위로 오기 때문에 머리에 열은 받는다. 열의 주입량을 조정하면서 방향과 고도를 잡는 것 같다. 아마도 특수한 기술을 터득한 파이롯트인 것 같다.열기구가 상승하면서 세상을 달라 보였다. 평면이나 조금 구릉에서 보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사방으로 확트인 세상이 한 눈에 들어온다. 특히 히에라 폴리스 고대도시가 이렇게 큰 도시인줄은 몰랐다. 마침 일출 시간이라서 태양이 떠오르는 장면도 볼 수 있었다. 

 

 

이 고대도시가 만약 복원되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보았다. 정말 거대한 모습일 것 같았다. 고대도시를 배경으로한 영화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다행히 파이롯트가 유적지와 근접하여 비행을 하였다. 역시 파묵칼레도 다른 모습이었다. 주변과 다르게 하얀색의 옷을 입은 것이 완연히 드러났다.상공에서 1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서서히 하강을 했다. 착륙하는 것도 매우 궁금했다. 착륙지는 정해진 곳이 있었고, 열기구를 운반하는 트레일러가 대기하고 있었다. 지상으로 착륙시에 보조자들이 기구를 잡아서 트레일러에 부딪쳐 완전히 지상에 하강시켰다. 열기구에 한쪽으로 바람을 빼서 넘어뜨리고 접게 된다. 어쨌든 난생처음 비행도 성공적으로 끝났다. 나중에 열기구 파이롯트 이름이 서명된 탑승 인증서까지 주었다.

 

 

▶ 에베소

 

 

고대도시에베소는 기독교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도시이다. 사도 바울이 제3차 선교여행 때 에베소에 약 2년간 체류하면서 복음을 전했고, 에베소를 아시아 복음화의 전진 기지로 삼았다. 이곳에는 사도 요한이 성모 마리아의 여생을 돌보며 지낸 성모 마리아의 집이 있다. 1961년에는 교황 요한 23세가 성모 마리아의 집으로 공식 인정하고 성지(聖地)로 선포하였다. 이런 배경을 갖고 찾아온 에베소는 남다른 느낌이 들었다.고대도시를 보면 언제나 설레인다. 무너져 내린 성벽, 덜렁 하나 서있는 원기둥, 목이 떨어져 나간 동상 등 오랜 역사의 흔적이 묻어있는 유적을 보면 상상할 수도 없는 수천년의 숨겨진 스토리를 생각해 본다.

 

도대체 누가, 언제, 어떻게, 왜 이런 건물을 만들었을까. 어떤 기술과 인력이 있었기에 이런 아름다운 예술품을 손쉽게 만든 것일까. 에베소는 터키 서부의 에게 해 연안에 위치한 이즈미르주의 카이스트로스강 어귀에 있던 고대 그리스의 식민 도시 유적으로, 기독교 성서에 언급된다. 에페수스는 고대 그리스의 식민 도시로 건설되어 소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상업 요충지로 번성하였다. 에베소는 기원전 2세기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아시아 속주의 수도로서 지중해 동부 교역의 중심지가 되어 전성기를 누렸으며,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로서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에베소 유적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에세소 원형 대극장과 셀수스 도서관이다. 이 원형대극장에서는 연극과 문화예술 공연과 로마시대 말기에는 검투사와 맹수의 싸움이 벌어졌다고 한다.

 

 

3단 구조로 22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졌고, 높이가 18미터에 이른다. 2만5천명을 수용했다고 하는데 세계에서 가장 큰 원형대극장의 하나이다. 나는 무대와 계단에 앉아서 지긋이 눈을 감고 고대 시대로 여행을 해보았다.셀수스 도서관은 100~110년 사이에 건설된 아시아 속주의 총독을 지낸 셀수스 폴레마이아누스(Celsus Polemaeanus)의 무덤과 도서관을 겸한 2층 구조로 1만 2000여 건의 두루마리 장서를 보유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도서관의 정면 벽에는 4명의 여인의 석상이 있는데, 각각 지혜, 덕성, 학문, 지식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 건축물을 보면 탄성이 나온다. 이 방향 저 방향을 바라보며 수 십번의 셔터를 눌렀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도서관 앞에 홍등가가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공부를 하고 머리를 식히라는 것인지. 또 이 홍등가에 있는 여성에게는 많은 특권과 심지어 특정 남자를 거부하는 권한도 있었다고 한다.

 

 

공중 화장실도 눈길을 끌었다. 옆 사람과 칸막이가 없는 좌변기가 여러개 있다. 발 아래 물이 흐르는 데 솜을 물에 뭍여서 뒤처리를 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용변을 보면서까지 밀담을 즐겼다. 또 공중화장실에서 모아진 오줌으로 요산을 얻었고, 이것은 염색하는데 이용했다. 대리석 거리도 위엄이 있었고, 귀족들이 이용하는 명품 상점가에 길 바닥은 컬러풀한 타일을 깔았는데, 이 당시 귀족이 얼마나 화려한 생활을 했었나 상상할 수 있었다.

 

 

◎ 7일차 (트로이 목마를 타다)

 

▶ 트로이 유적지

 

 

트로이 하면 트로이 목마가 생각난다. ‘트로이 전쟁’ 영화를 통하여 본 트로이 목마가 유적직 입구에서 눈길을 사로잡았다. 메넬라오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스파르타의 왕으로 미녀 헬레네의 남편이자 아가멤논의 동생이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납치한 아내를 되찾기 위해 아가멤논과 함께 트로이 전쟁을 일으킨다. 10년 동안의 전쟁은 전쟁영웅 그리스의 오디세우스의 계책(트로이 목마: 거짓 선물)에 의해서 승리하게 된다. 그리스 신화에서 비롯된 ‘트로이의 목마’는 외부에서 들어온 요인에 의하여 내부가 무너지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이 전쟁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는 구전이 되다가 상상력이 풍부한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로 전해지게 되었다. 많은 역사가들은 트로이 전쟁을 호메로스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한 사건이라고 간주했으나, 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에 의해 발굴이 되어 트로이 유적지로 발견되면서 트로이의 존재가 사실이었음이 증명되었다.슐리만은 이때 발굴한 유물들을 독일로 밀반출, 1881년 베를린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공개함으로써 찬란했던 트로이문화가 세상에 알려졌다.

 

 

1945년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은 이를 탈취, 금·은 보물은 모스크바 푸시킨미술관에, 도자기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미술관에 소장하다가 1995년 4월 푸시킨미술관에서 다시 전시되었다. 트리이 유적은 9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최하층은 BC 4000년 말기의 것으로, 성벽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제2층에는 메가론식의 왕궁으로 짐작되는 건물이 있고, 이 층에서 많은 금·은 제품을 발견하였으며, 이 층을 호메로스 시대의 것으로 생각하였다. 슐레이만 이후 독일 되르프펠트, 미국의 블레겐이 조직적으로 발굴하여 제7층 B는 철기시대 초기, 제8층은 아르카이크 시대, 맨 위층인 제9층은 헬레니즘 시대 및 로마시대 유적으로 밝혀졌다.아킬레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활약하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Paris)에게 발뒤꿈치에 화살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아킬레스 건이란 명명은 이 신화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아킬레스 어머니 테티스가 아들을 불사신으로 만들 때 스틱스 강에서 발뒤꿈치를 손을 잡아서 그 곳에 물이 묻지 않았다. 곧 그곳이 치명적이 약점이 되었고, 트로이 파리스 왕자가 독화살을 아킬레스의 발뒤꿈치에 명중시켜자 곧 죽게 되었다.

 

▶ 다르다넬스 해협 (랍세키 항구 – 겔리볼루 항구)

 

트로이 유적지를 떠나 이스탄불을 가기 위해 다시 배를 타게 되었다. 약 30분 동안 아시아 쪽의 랍세키 항구에서 유럽쪽의 겔리볼루 항구까지 이동했다. 이 곳은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영국과 터키가 교전국(交戰國)이 되자, 영국은 지중해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서 겔리볼루의 제압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5년 2월 19일과 25일, 3월 25일에 걸쳐 영국 ·프랑스의 연합함대가 다르다넬스 해협의 터키 연안의 방비시설을 포격하였으나, 포대(砲臺)로부터의 맹렬한 반격과 기뢰(機雷) 등으로 3척의 전함이 격침되고, 3척은 대파되었다. 이 전투로 연합군 전사상자(戰死傷者)가 무려 25만 2000명에 이르렀으며, 터키군 사상자도 25만 1000명이나 되었다. 이 전투로 케말파샤 무스타파는 대령에서 장군이 되었고,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총사령관에서 포병사령관으로 좌천되게 된다.

 

▶ 탁심광장과 이스탄불 야경

 

 

탁심광장에 역시 아타 투르크 동상이 있다. 이곳에는 하루 300만명의 유동인구가 다닌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명동거리와 다를 바 없다. 인종시장이다. 탁심광장에서 걸어서 갈라타 대교를 건너 유람선을 타고 위스크다르 항구로 갔다. 밤에 보는 이스탄불은 다른 도시같다. 세계 3대 야경에 포함에 될 정도로 아름답다. 골든혼(황금 곶)이 폭이 좁아서 더욱 그렇다. 갈라타 타워, 블르모스크, 돌마바흐체 궁전, 위스크 다르 언덕 등 불빛에 젖은 유적들이 고고한 역사를 밝히고 있다.

 

 

 

◎ 8일차 (이스탄불 탐방 후 귀국 비행기를 탑승하다)

 

▶ 그랜드 바자르

 

그랜드 바자르는 이스탄불 구시가지에 위치하며, 5,000개의 상점이 모여있는 터키 최대의 재래시장이다. 7개의 출입문이 있으며 무장 경찰이 총기를 휴대하고 검문 검색을 하고 있다. 세계 인종시장을 방불케 한다. 다양한 복장의 인종들이 오가고 있다. 카펫, 패션, 금속류, 토산품 등 다양하지만 구매보다는 시장이라는 것을 즐긴다. 비슷한 길이 많아 미로같다.

 

▶ 슐탄 아흐메트 (구시가지): 히포드럼 광장

 

 

히포는 말, 드럼은 경기장이란 뜻이다. 10만을 수용하는 U자형 말 경주장인데, 지금은 그 형태는 없다. 이곳에는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을 상징하는 32미터 사각주 형태의 오벨리스크가 있다. 이집트가 아닌데 이 거대한 화강함 통석이 이곳에 있을까. 본래 기원전 1450년, 이집트 룩소르의 카르낙 신전에 3개의 오벨리스크 가운데 한 개가 이스탄불 하드포럼 광장에 위치한다. (1개는 카르낙신전에, 1개는 미국 워싱턴). 1500년이 지나 서기 357년에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2세가 전리품으로 가져왔다고 한다. 뱀 세마리가 뒤엉킨 사문석 오르메타쉬 기둥, 본래 델포이 아폴로 신전에 있었다고 전한다.

 

오벨리스크 뒤로 세 마리의 뱀이 뒤엉켜 있는 사문석이 있는데 원래 직경 3미터의 황금 그릇을 떠받치고 있는데 지금은 윗 부분이 파괴되었다. 또 1,200년전 로마제국 콘스탄티누스 7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공덕탑이 있는데 청동 부분은 없었지고 석탑만 있다. 또 독일 빌헬름 2세가 기증한 사원의 세정대가 있다. 이스탄불은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곳곳에 유물들이 흩어져 있다. 터키 문화재청은 이 유물, 유적을 복원하고, 보존하는데 총력을 기우려야 할 것이다.

 

▶ 블루 모스크 (슐탄 아흐메트 모스크)

 

 

터키를 대표하는 사원이며, 사원의 내부가 파란색과 녹색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기 때문에 유럽인들이 블루 모스크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제14대 술탄 아흐메트 1세가 성소피아 성당을 보고 이 보다 더 좋은 모스크를 만들기 위해 1609년에 짓기 시작하여 1616년에 완공했다. 미나렛(첨탑)은 보통 1개, 2개, 4개까지 있는데 이곳 블루 모스크에는 6개의 첨탑이 있는 것은 술탄의 권력을 상징한다.

 

 

문입구에 삼각형 쇠사슬이 걸쳐 있는 것은 술탄 일지라도 말을 타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또 사원 안으로 들어가지 전에는 반드시 손과 발을 세척하도록 세정대가 준비되었다. 모스크 안에는 성화나 일체 없다.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있는데 새겨진 투립 모양 하나에 한명씩 앉고, 여성은 남성 뒤에서 예배를 본다.

 

 

▶ 성소피아 성당

 

 

성소피아 성당은 약 900 여년 동안은 기독교 성당으로 약 450 여년은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가 공존하는 건축물이다. 1,500년전에 5년 10개월만에 완성된 세계 9대 불가사의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완성한 동로마제국(비잔티움)의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이겼노라”라고 말했다. 정복자 오스만투르크 술탄 메흐멧 2세(당시 21세)는 1453년 5월 29일,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있는 난공불락의 철옹성의 요새인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킨다(공성전).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건국한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누스 11세를 마지막 황제로 1123년의 막을 내리게 된다.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날이 그름날이어서 터키 국기에 초승달이 아니라 그름달이 있다. 또한 이날을 이스탄불에서는 휴일로 정하고 있다. 콘스탄티노풀을 함락한 술탄 메흐멧 2세는 이 건물을 파괴하지 말라고 할 정도이니, 얼마나 아름다운 건축물인지 알 수 있다. 무슬림은 성소피아의 성화에 회반죽을 덧칠하고 십자가를 뜰어내고, 메카를 향하는 미흐랍, 설교대인 밈베르를 설치하고 아랍의 성전을 붙인다. 내진 설계를 어떻게 했는지 강한 지진이 30여 회 있었지만 견디었고, 일부는 약 15도 기울어졌다. 현재 건물 내부에는 절반을 막아서 복원 작업중에 있다.

 

 

▶ 톱카프 궁전

 

 

톱카프 궁전은 400여 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궁전으로 이용되었고, 제국 말기에 돌마바흐체 궁전으로 옮겼다. 궁전에는 5,000여 명이 거주하고, 주방에만 1,500여 명이 근무했다고 한다. 식수인원이 2만명 정도 였다고 하니 가히 그 규모를 짐작이 간다. 이곳에는 왕의 여자와 관계를 우려하여 내시는 흑인만 두었다고 한다. 왕의 집무실은 위엄이 있었으며 외국 사신들은 감히 왕을 볼 수도 없었고, 기어 들어와 알현했다고 한다. 밖에서 비밀스런 이야기를 듣지 못하도록 수돗물을 틀어놓기도 했다고 한다.궁전에 있는 시계 박물관의 유물들을 보고 놀랐다. 1,800년대에 만들어진 시계는 현재의 시계와 다를 바가 전혀 없었고, 오히려 더 정교하고 값비싼 장식으로 화려했다. 병기창에는 각종 검, 총기류 들이 전시되었다. 이 밖에 집무실, 도서관 등이 있었고, 마르마라해를 바라볼 수 있는 정원은 술탄의 휴식처로 훌륭했다. 23만 여평의 톱카프 궁전, 400년 오스만 제국의 광활한 영화와 찬란한 영광이 한 곳에 모인 것 같았다.

 

 

▶ 공항이동/ 귀국

새벽 5시에 일어나 오전에 이스탄불 구시가지 투어와 점심을 마치고 아타투르크 공항으로 향했다. 설레임으로 시작한 여행은 어느덧 피곤이 겹쳐지고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야하는 무거움이 다가온다. 일주일 넘게 달려온 시간들, 잠시 자신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자유를 만끽했다. 필자의 특유의 버릇은 일관된다. 한 손에 수첩과 펜, 한 손에 카메라를 들고 작은 것부터 큰 것에 이르기 까지 터키를 가지려 했다. 그 수첩을 잃어버릴 지라도, 아니 터키가 기억에 얼마나 남을지 모르지만 나는 터키를 나의 역사에 기록하고 싶었다. 가이드를 가장 근접해서 다니면서, 이것 저것 물어보고 궁금증을 해소하는 것으로 행복했다.

 

◎ 9일차 (융합문화의 보고인 터키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다)

 

▶ 인천공항 안착

비행기 탑승 9시간 만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약 700여 장의 사진을 검색해 보았다.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곳,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가 공존하는 터키를 아름답게 담아 보려고 애를 썼다. 애를 쓴 만큼, 담겨진 사진속에 추억은 더욱 새록했다. 형제의 나라 터키, 오스만 제국, 무스타파 케말, 콘스탄티노플, 성소피아 성당, 에베소/트로이 고대국가 등등, 학교에서 배운 지명과 역사 이야기를 현장에서 체험과 함께 이해할 수 있어 너무 행복했다.

 

 

한마디로 터키는 아시아-유럽, 기독교-이슬람 문화가 공존하는 융합문화의 보고이다. 터키에서 만 볼 수 있는 소금호수, 카파도키아, 파묵칼레, 올림포스산 등의 자연의 신비와 성소피아, 블루모스크, 톱카프 궁전, 돌마바흐체 궁전, 히포드럼 광장, 고대도시 등의 역사적 유적지는 이방인에게 더 큰 감동을 주었다. 대평원에 펼쳐진 밀밭, 올리브 동산이 끝이 없다. 곳곳에 세워진 이슬람 첨탑은 여기가 터키라는 것을 표식한다. 맑은 하늘에 지나가는 소낙비 사이로 선명한 일곱색깔의 무지개가 보인다.

 

이방인을 환영하는 듯하여 그 아름다운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어느덧 하강하는 비행기는 우리 땅에 살포시 발을 내딪는다. 내가 비워두었던 자리에 터키의 추억을 가득 담아왔다. 이제 추억을 뒤로하고 잠시 잊었던 소통을 바쁘게 해야 한다. 그래도 일주일 동안 놓치지 않고 나의 메모장에 적어둔 내 기억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기록을 마치게 된다. 내 손가락이 아프고, 수 시간 동안 이 글을 작성하는 동안 다소 힘은 들었지만 나의 역사를 쓰는데 매우 행복했다. 촉 싸올 (감사합니다)

 

 

* 2018년 6월에 개봉된 터키 영화 ‘아일라’가 가슴을 뭉클케 한다. 6.25 전쟁으로 파병된 참전병 슐레이만은 전쟁 고아 5살 소녀를 만나고, 약속을 지킨 감동의 드라마이다. 아일라는 터키말로 달이라는 뜻이고 소녀에게 준 이름이다. 슐레이만이 귀국후 오래 세월 끝에 60년 만에 그 소녀를 만난다. 터키는 6.25 전쟁 당시 미군, 영국군 다음으로 1만 5천명을 파병했고, 그 만큼 사상자가 많아다. 터키인들은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 부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역사적으로 돌궐(투르크)과 고구려의 인연이 기록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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